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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포인트 포스터.jpg

알 포인트는 2004년에 개봉한 한국의 공포 영화이다.

시놉시스

1972년, 베트남 전쟁의 막바지, 200명의 부대원 중 혼자 살아 남은 혼바우 전투의 생존자 최태인 중위(감우성)는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의 본대 복귀 요청은 철회되고, CID 부대장(기주봉)은 그에게 비밀 수색 명령을 내린다.

72년 2월 2일 밤 10시. 이날도 사단본부 통신부대의 무전기엔 "당나귀 삼공..."을 외치는 비명이 들어오고 있다. 6개월 전 작전 지역명 '로미오 포인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18명의 수색대원들로부터 계속적인 구조요청이 오고 있었던 것. 그 흔적 없는 병사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을 확보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표다.

3일 후, 좌표 63도 32분, 53도 27분 로미오 포인트 입구. 어둠이 밀려오는 밀림으로 들어가는 9명의 병사들 뒤로 나뭇잎에 가려졌던 낡은 비문이 드러난다.

不歸! 손에 피 묻은 자, 돌아갈 수 없다!!! 7일간의 작전, 첫 야영지엔 10명의 병사가 보이고... 그러나 이제 하루가 시작되고 있을 뿐이다.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등장인물

  • 최태인 중위(감우성)

충무무공훈장에 미국 은성훈장을 받았고, 혼바우 전투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까지는 환자로 병원에 있는 상태였으며 곧 퇴원 예정인 상태였으나, 사창가의 사건으로 헌병에 잡혀 CID 본부로 호출된다. 작전에 나가면 항상 피를 본다는 소문이 파다하고[1] 사병들도 소대원이 되는 걸 꺼린다고 한다.

  • 진창록 중사(손병호)
  • 박재영 하사(이션균)

색소폰을 불던 군악병이었다. 군의관이 멀쩡하게 생겨가지고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배우와 마찬가지고 잘생긴 것으로 보인다.

  • 마원균 병장(박원상)

취사병이었다.

  • 장영수 병장(오태경)
  • 오규태 병장(손진호)
  • 변문섭 상병(문영동)

무전병

  • 이재필 상병(정경호)

기관총 사수, 진중사와 더불어 마테체를 들고 다닌다.

  • 조병훈 상병(김병철)
  • CID 대장(기주봉)
  • 강대위(안내상)
  • 정일병(이동운)
  • 정숙아 병사(송갑석)
  • 소녀(이은혜)

줄거리

수색대 출발 전

1972년 1월 7일 오전 1시 30분, 베트남 나트랑의 한국군 연대 본부(호출부호: 하늘소)로 한 무전이 온다. 당나귀 삼공에서 우린 다 죽는다라는 말과 함께 총소리와 비명이 들리는 무전이었다.

CID 대장(기주봉)은 온 얼굴과 팔에 붕대를 감은 사람(안내상)에게 '당나귀 삼공이 당신 부대 호출부호가 맞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는 그럴 리 없다며 우리 애들 모두 다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CID 대장은 6개월 전에 죽은 병사가 3일 전에 연대 본부에 때린 무전이며 이번달에만 3번이나 왔다고 하며 누구냐고 묻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죽은 애들 인식표를 피 묻은 두 손으로 직접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CID 대장이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물으나, 그는 알 포인트에는 베트콩은 없으며 모두 다 죽었다고 절규할 뿐이었다.

최태인 중위(감우성)는 김일병과 외출에 나와서 사창가에 간다. 그러나 갑자기 총소리가 나기에 권총을 들고 복도로 나온다. 베트남 소녀가 청소도구를 들고 다가오기에 권총을 겨누고 멈추라고 하니, 소녀는 쏘지 말라고 말하고는 청소도구에 손을 대려 한다. 결국 최중위는 소녀를 쏘고 청소도구를 살피니 소총이 있었다. 김일병이 들어간 방으로 가니 그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김일병은 '시발 내 이럴 줄 알았어'라고 흐느낀다.

최중위는 김일병의 시체와 함께 헌병 지프를 타고 본부로 간다. CID 대장은 최중위의 경력과 소문을 이야기하고는 6개월 전에 알 포인트에서 실종된 수색대원들의 보고서를 건낸다.(보고서 첫장이 바로 강대위 사진이다. 이로써 강대위 맨얼굴을 볼 수 있다.) 소대장을 할 것을 권유하나 최중위는 본대로 복귀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CID 대장은 한 서류를 태우고는 어제 사건을 없던 걸로 해준다고 한다. 최중위는 명령이냐고 물으나, 소대장으로서의 복직을 축하한다는 말만 듣는다.

군병원, 군의관이 성병에 걸린 군인들을 검사한다. 군의관과 간호사가 장영수 병장(오태경)의 것을 보고는 깨끗하다며 어떻게 된 건지 묻는다. 장병장은 솔직하게 성병 검사 카드를 바꿔주면 50불을 주기로 했다고 말한다. 군의관이 사유를 묻자 50불이면 소가 한 마리라며 어머니께 소 한마리 사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군의관이 인적사항을 보고는 18살인 사실도 드러난다. 즉 16살에 입대한 것. 형의 입대 영장을 식구들 몰래 대신 들고 입대했다고. 주변에서는 진짜 미쳤다고 탄식한다. 결국 검사 결과 병사들 모두 귀국이 보류된다.

밤, 내무반에서 한 간부가 진창록 중사(손병호)와 함께 병사들에게 작전 지원을 권유한다. 작전에 지원하면 열흘 후에 출발하는 탑승 티켓을 주겠다고 한다. 귀국선이 아니라 귀국 비행기이며 쭉 빠진 스튜어디스들이 주스도 나눠준다기에 박재영 하사(이션균)는 손을 들고 곧바로 지원한다.

부두에서 작전에 지원한 소대원들의 군장을 진중사가 검사하던 중에, 최중위가 지프를 타고 도착한다. 출발 전 대기하며 병사들이 노닥거리던 중, 박하사는 변문섭 상병(문영동)에게 진중사와 같은 부대였으니 어땠냐고 묻는다. 변상병은 엄청 살벌하고 월남 3년이며 베트콩의 잘린 머리를 양손에 들고 찍은 사진도 있다고 한다. 이에 마원균 병장(박원상)은 누가 그런 거 한번 안 해본 놈이 어딨냐며 자신도 해봤다고 큰소리친다. 홀로 공을 던지고 있는 최중위를 보며 오규태 병장(손진호)과 병사들은 한명은 완전 꼴통에 또 하나는 쌩또라이니 고생복이 터졌다며 한탄한다. 장병장이 일주일 뒤에 꼭 보자고 외치며 배가 부두에서 출발한다.

상륙 후 오병장은 작전 끝나며 헤어질 테니 사진 한장 박자고 한다. 병사들 모두 동의하나 진중사는 카메라를 뺏어들고는 소풍 나온 줄 아냐고 갈구나, 최중위는 한장 찍자는 한마디로 상황을 만류한다. 그렇게 8명이 나오는 기념 사진을 오병장이 찍으며 수색이 시작된다.

알 포인트 1일차

알 포인트 2일차

알 포인트 3일차

알 포인트 4일차

평가

2000년대 한국 공포 영화의 수작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2024년에는 영국 영화 협회가 소개하는 무서운 한국 공포 영화 22편 중 한 편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

흥행

160만 관객을 기록하였다.

제작 과정

영화 '하얀전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관심으로 시나리오가 제작되었으나, 흥행성이 부족한 이유인지 제작자 쪽에서 받아주질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시나리오에 호러라는 장치를 가미한 후에야 겨우 진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감독으로 내정되어 있던 사람이 갑자기 포기를 하는 바람에 촬영 한달 전에서야 공수창 감독이 감독을 맡게 되었다. 당시 공수창 감독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을 정도라고.

마케팅

홈페이지에 최근 사망한 베트남 종군기자 알버트 T. 에반스라는 가상 인물의 유품에서 발견된 내용을 재구성하였다며 일기, 동영상 등의 홍보 자료를 공개하였다.

영화의 개봉 당시, 홍보 자료가 실화 기반처럼 보였기에 오해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 공수창 감독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모호하게 답하여 더욱 오해를 주기도 하였다.[2][3]

알버트 T.에반스의 일기 전체 내용

기타

  • 폐저택 장면은 캄보디아의 보코산 국립공원에 있는 보코 팰리스 호텔에서 촬영되었다. 보코 팰리스 호텔은 2018년에 리모델링되기도 하였다.
  • 대나무숲 장면은 담양군의 죽녹원에서 촬영되었다. 죽녹원에도 알 포인트 촬영지 표지판이 있다.
  • 당시 촬영 현장 후기 #

외부 링크

각주

  1. 그 대상도 아군이든 적군이든 간에라고.
  2. 공수창 감독이 이런 실화 마케팅은 마음에 들지 않는 진행이었다고 한 말을 볼 때, 영화의 성과를 위해 일부러 모호하게 답하였을 수도 있다.
  3. 혹은 베트남 전쟁 당시 실종된 장병들이 존재하였기에, 이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답한 것일 수도 있다.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포로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이며, 포로들이 납북된 것을 인정한 것도 2009년부터였다.
  4. 컨텐츠 대부분이 플래시 기반이었던 데다가 아카이브가 제대로되지 않아서 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